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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행정복지센터

학운동 신림마을
  • 작성부서학운동
  • 작성일시2020/10/12 10:52
  • 조회수110

신림마을(新林)


신림마을


○ 구전자료에 의하면 신림마을은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영암에서 살던 주민들이 집단 이주하여 무등산 
    증심촌 아래쪽에 마을을 새로 형성하였기에 新林村으로 명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음 
국토정보 플랫폼 지명유래집의 구 지명대장에 삼백년전 종전 인가가 없던 것이 새로이 삼림 속에 생겨난 부락이라 하여 새로울新과 삼림(森林)의 수풀林자를 따서 신림(新林)이라고 칭하였다고 함.


 ○ 문헌자료에 의한 행정구역을 살펴보면
  - 1789년(조선 정조13년) 작성된 호구총수에 광주군 서면 지동리에,
  - 일제강점기인 1912년 마을조사에는 광주군 지한면 신림리로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광주군 지한면 운림리(운곡리+신림리)
  - 1935년 광산군 효지면 운림리
  - 1955년 전라남도 광주시 운림동
  - 1961년 전라남도 광주시 동부출장소 운림동
  - 1973년 전라남도 광주시 동구 운림동
  - 1986년 광주직할시 동구 운림동
  - 1995년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에 속하였다.


○ 신림마을은 증심사 아래 있는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운곡과 신림이 운림리로 불리게 됨에 따라 운곡리에 속해있던 증심사 주변 증심곡, 이병곡, 덕산곡, 말시복, 콩마담점, 백토고개점에 산재해 있던 소규모의 가옥들이 마을로서 이름을 유지하지 못하고 증심골, 이병골, 덕산골 등이 운림리로 통칭 되면서 운곡과 신림의 경계가 모호해 해방이후에는 신림마을로 불리어져 왔다.
 
○ 신림마을은 1970년대 유원지로 지정되면서 유다리(六橋, 현재는 증심교)에 시내버스 주차장이 생기고 134가구가 들어섰으며 이중 64호가 요식업으로 생활하였으며 1990년대 말까지 유원지로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 이후 2002년부터 2010년까지 광주광역시에서 추진한 증심사 지구 환경복원사업으로 증심사 계곡에 있던 식당과 주민들이 시설지구와 이주단지로 이전하여 마을이 없어지고 현재는 마을이 있던 자리에 집터의 흔적만 군데군데 남아있으며 무등산 국립공원 내 마을이 있던 자리에 신림마을 표지석만 남아있다. 


< 신림마을의 유물유적 >


○ 신림마을은 증심사와 약사사가 있으며,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오백전, 석조보살입상, 삼층석탑과 약사사의 석조여래좌상, 천제단, 춘설헌, 오방수련원,세인봉산성, 운림골 느티나무 등이 있다.


- 증심사(證心寺)는 광주문화재자료 1호로 광주의 대표적인 불교사찰이다.
증심사는 신라 헌안왕 4년인 860년 칠감선사가 창건하고 고려 선종 11년인 1094년에 해조국사가 중수하였으며, 조선 세종 25년인 1444년 전라도 관찰사 김방이 자신의 녹봉으로 중창한 사찰이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광해군 1년인 1609년에 석경․수장․도광 등의 선사들이 중창하였고, 일제 강점기 초에는 임제종 운동의 본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중수를 거듭하다가 1951년 4월 50여명의 무장공비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1970년 대웅전을 시작으로 차례로 복원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증심사 전경        증심사 오백전
                     〈증심사 전경〉                                           〈증심사 오백전〉
 

< 증심사 창건설화 >


 - 신라시대 한동만이란 사람이 증심사 계곡에 살았다.  어머니 장례를 치를 때 그의 어머니로부터 은혜를 입은 여승의 아들이 은혜를 갚고자 찾아와 명당을 잡아 주었다.  그러나 한동만은 지관의 말에 넘어가 묏자리를 옮기고 말았는데 여승의 아들이 다시 나타나 그 자리를 다시 메우고 명당을 파헤친 액땜을 하기 위해 절을 세우고 불공을 드리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절이 증심사라고 전해진다.


-  증심사에는 보물 제131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세종대왕 때 지어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제 제13호 오백전 등 여러 문화재가 있으며, 절 그 자체가 광주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 1호로 지정될 만큼 오랜 역사성을 인정 받고 있다.
 
- 증심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은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 대웅전 뒤에 있는 비로전의 주불상으로 통일신라말(9세기) 쯤에 나타난 철불상의 하나로 당시 이 지방에 비로사나불을 섬기는 신앙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 증심사 오백전은 지방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 대웅전 뒤편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맛배지붕 건물로 증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443년 조선 초기에 만들어졌다.


- 증심사 석조보살입상은 지방유형문화재 14호로 지정되어있다. 증심사 오백전 오른쪽에 있으며 본래 서봉사지에 있던 것을 옮긴 것으로 높은 원통형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전체 높이가 205cm이며 고려시대 작품으로 여겨진다.
 
- 증심사 삼층석탑은 지방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 오백전 앞에 세워져 있으며 석탑의 총 높이는 3.2m로 그다지 높지 않으나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 약사사(藥師寺)는 운림동 산 11번지에 있는 사찰로 6.25때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았다.  원래는 인왕사라 하였고 철감선사가 이 암자를 세워 기거하면서 증심사를 지었다고 전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약사사           약사사 석조여래좌상
                        〈약사사〉                                                 〈약사사 석조여래좌상>


- 약사사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600호로 지정되어 있다.약사암 대웅전에 봉안된 불상으로 전체 높이는 25m이며 호남지방에서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는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게 보존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 천제단(天際檀)은 옛날 광주고을 사람들이 국태민안의 기원과 기우제를 올리던 제단이었다.  삼한시대부터 제를 올리던 곳으로 증심사에서 중머리재로 가는 길 중간지점 인 신촌고개 왼쪽에 있다.


- 운림골 느티나무는 증심사를 막 지나 중봉에 이르는 가파른 길목 돌단에 쌓여 있는 신목(神木)이다. 수령이 500년이 훌쩍 넘는 이 나무는 높이 26m, 둘레 6m에 이르며 지금도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에 무당산 상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 오방수련원은 무등산 당산나무 아래 자리 잡고 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한국기독교사적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방 최흥종 목사가 오방정에 머물면서 신림마을 주민들에게 복음을 뿌려 1950년 4월 7일 신림교회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현재는 신림교회가 운림길 57-3 (운림동 568)번지로 이전하면서 현재는 신림교회 오방수련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석아정(石啞亭), 최원순 ⇨ 오방정(五放亭), 최흥종 ⇨ 춘설헌(春雪軒), 허백련

  느티나무         오방 수련원
                   〈느티나무〉                                                  〈오방 수련원>
     
 - 허백련 춘설헌(許百鍊春雪軒)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있다. 한국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이 해방 직후인 1946년부터 1977년까지 30년간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던 곳으로 1950년에 종래의 낡은 집을 헐고 벽돌로 새로 지은 건물로 마루에는 춘설헌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마루 왼쪽으로는 작품 활동을 하던 2개의 방이 있는데, 하나는 온돌방이고 하나는 일본식 다다미방이다



○ 문빈정사는 1954년 4월 대웅전 부지는 밭, 앞마당은 증심사 소유의  논으로 이루어진 터에 작은 초가집이 있었고 보살님들이 치성을 올리는 암자로 이용된 것을 보리심 장문빈 여사가 매입하여 1959년 장문빈 보살님의 이름을 따 문빈정사를 창건한 후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백양사 말사로 등록 되었다. 불교운동과 민족민주운동의 산실로서 1980년대와 90년대에 지선스님은 이곳에 주지로 취임 후 민족민주화운동과 종단개혁에 앞장섰으며.
성보로는 법계성범수륙승회수재의궤등 불교문헌 11종12책이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2013년 12월 24일 지정되었다.

문빙정사 사진제공

〈문빈정사 사진제공>


○ 의재미술관(광주 동구 증심사길 155, 운림동 85-1)
- 의재미술관은 2001년 11월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의 화업(畵業)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된 미술관이다. 무등산 증심사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담한 현대식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의재미술관이다.  의재미술관이 지어진 이곳이 바로 삼애학원, 농업기술학교가 있던 자리이다.. 허백련이 20년 동안 기거하면서 화실로 사용한 춘설헌, 찾아온 손님들을 만나던 관풍대, 직접 가꾸어 온 녹차밭과 허백련의 묘소까지 이 주변‘의재문화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숲 속 미술관의 멋진 모습만큼 의재미술관의 위치 역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의재미술관 사진제공
〈의재미술관 사진제공〉


○ 관풍대 무등산 도인 의재 선생이 세상과 조우하던 곳
- ‘관풍’은 논어에 나오는 말로 ‘세상을 본다’, ‘시류를 본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뜻을 담은 관풍대는 의재 선생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사랑방 같은 장소였다. 춘설헌 아래 등산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이곳에서 춘설차를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 신림마을의 역사적 인물 >


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
- 허백련 선생은 조선 후기 한국 남종화를 완성했던 허련의 후손으로, 허련의 아들 허형에게서 그림의 기본을 익히고, 일본과 서울에서 그림공부를 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진도에서 태어난 허백련은 20세기 우리나라 남종문인화의 대가(大家)이다. 일본 유학을 다녀와 전국적으로 활동하던 그는 1937년 광주에 정착하였고, 무등산 자락 춘설헌에 기거하면서 명작을 완성하였다. 
- 또한 시서화(詩書畵) 동호인 모임 ‘연진회(鍊眞會)’를 조직하여 많은 화가들을 길러냄으로써 광주가 예향(藝鄕)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하였다. 우리의 산과 들을 그렸지만 허백련은 단순히 그림에만 몰두한 화가는 아니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피폐된 농촌중흥을 위해 농업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지도자를 육성하였고, 한편으로는“하늘과 땅과 사람을 사랑하자”는 삼애사상(三愛思想)을 제창하였다.
- 무등산 기슭에서 재배한 차를 ‘춘설차(春雪茶)’라 이름 짓고 ‘차를 마심으로써 정신을 맑게 하자’며 차 문화 보급에도 앞장섰다.
  
광주 최초의 한국인 목사 최흥종
- 오방(五放) 최흥종(崔興淙, 1880~1966)은 광주 기독교계의 선각자로 이고장 최초의 한국인 목사이며 일제에 항거한 독립투사로 뿐만 아니라 나병환자의 어버이로서, 또는 청년운동가로서 우리 향토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
- 25세 때 기독교에 입교, 북문밖교회(중앙교회), 금정교회(제일교회), 제주 모슬에서 시무 하였고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 되었으며 1920년 광주YMCA를 설립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며 한센병과 결핵퇴치, 빈민운동에 힘써 봉선리 나병원(1912~1926), 애양원(1926), 삼애학원(1947), 호혜원(1955), 송등원(1958), 무등원(1962)을 설립하는 등 사회운동에 헌신하였다.  특히 현재의 춘설헌은 최흥종 목사가 1936년 석아 최원순 선생으로부터 인수하여 머물다가 허백련 화백에게 물려준 거처이다.


도쿄 2.8 독립선언의 주역, 최원순
- 최원순(崔元淳, 1897~1937)은 독립운동가이며 언론인으로서 지역계몽운동을 선도한 선각자이다.  광주공립보통학교(현 서석초) 4회 졸업생으로 장광호, 장영규 등 동기생들과 함께 1919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부 유학시설  2.8독립선언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 편집국장 서리까지 지낸 뒤 건강이 나빠지자 광주로 내려와 현재의 춘설헌 자리에 집을 지어 서예가 성당 김돈희가 쓴 석아정이라는 현판을 달고 요양하였다.

 

광주 최초의 여의사 현덕신
- 현덕신은 최원순의 부인으로 여성개화의 선구자이며 학운동에 춘설헌의 전신 석아정을 만든 사람이다.
-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현덕신(玄德信, 1896. 1.12. ~ 1963.11.27.)은 15세에 서울로 유학, 이화학당을 졸업했으며, 일본 도쿄로 유학,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마치고 산부인과 및 소아과 의사가 되었다. 일본 유학시절 와세다대학 2학년이던 최원순과 만나 그가 주동하는 2.8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뒤에 최원순이 옥고를 치르고 나오자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져누운 그를 간호하면서 서로 사귀게 되어 인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1928년 5월 남편을 따라 외아들과 광주로 내려와 충장로 4가 화니백화점자리에 집을 얻어 개업하였다. 눈을 못 보는 시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으며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남편을 위하여 9년 동안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여성운동가로서 문맹퇴치를 위해 여자노동야학을 개설하였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인회 회장, YMCA회장으로 대한부인회 활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시대가 왜곡한 청년 박흥숙
- 무등산 타잔으로 불리워진 박흥숙은 1977년 4월 20일 무등산 증심사 계곡 덕산골 무허가 주택 철거과정 중 철거반원 4명이 살해된 사건의 범인이다.
- 범행뒤 서울로 도주하여 이모집에 은신하였으나 시민의 제보로 체포되어 사회 일각에서 구명운동이 펼쳐졌으나 결국 1980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건은 강제철거가 빚은 불행한 역사의 한 장면으로 무등산 중턱에서 1970년대의 사건이 2009년 용산 한복판에서 유사한 상황으로 재현되는 등, 강제철거의 수난 속에서 발생한 놀라운 경제성장의 비극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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