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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 × 산책하다

동구 × 산책하다

동구 인문산책길

동구에 산재해 있는 역사적, 문화적 자원들을 스토리텔링을 통해 엮어 우리지역 역사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도모하고자 조성되었습니다.

광주정신원형길

광주 근대역사 속 불의에 맞섰던 인물들과 장소의 이야기를 통해 ‘나눔’과 ‘저항’의 정신인 ‘광주정신’의 원형을 찾아가는 길

서석초등학교 → 현덕신병원 터 → 흥학관 터 → 장재성생가 터 → 정율성생가 터 → 신문잡지종람소 터 → 부동교 → 호남동성당 → 광주교 → 광주극장 → 장재성빵집·김기권문방구 터 → 광주우체국 → 춘목암(미문화원) 터 → 본원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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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14건

  • 서석초등학교 동구 제봉로82번길 26
    서석초등학교는 1896년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공포된 소학교령에 따라 1896년 11월 6일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로 문을 연 광주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다. 서석초등학교는 민족교육의 요람으로서, 특히 서석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교사 송홍은 민족교육자로서 많은 제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2·8독립선언의 주역인 최원순, 정광호, 장영규,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 장재성을 비롯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 영화감독 정준채, 작곡가 정추와 그의 형제들, 정율성의 형제들도 광주공립보통학교 출신들이다.
    사진출처 서석초등학교 ⓒ문화재청
  • 현덕신병원 터 동구 문화전당로 20 (남동 40번지) 일대
    호남최초의 여의사, 현덕신(玄德信)의 병원이 있던 터이다. 현덕신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유학시절 2.8독립선언 준비를 위해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귀국 후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의사로서 조선 여성을 위하여 투신하였다. 일본 유학중에 알게 된 최원순과 결혼하고 광주에 정착, 의사로서 지역사회에 헌신하였다. 1949년 현덕신병원 안에 신생유치원을 열고 유아교육에도 앞장섰고, 1951년에는 신생보육학교를 개교하여 교사양성에 힘을 쏟았다.
    사진출처 현덕신병원 ⓒ최영훈·이동순
  • 흥학관 터 문화전당로35번길 8 (광산동 100번지) 일대
    흥학관은 1921년 광주의 유지였던 최명구가 회갑을 기념하여 지어 기증한 곳으로서 ‘흥학관’이라는 이름처럼 광주 사람들이 배우고 익히며 민족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민의의 광장이요, 민족운동의 근거지였다. 다양한 사회단체가 모여 광주전남 지역사회의 현안과 문제를 진단하고 토론하고 결정을 내린 진보적 활동의 거점이었고, 광주 교육의 거점으로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간이학교를 운영하여 민족의 미래를 도모한 곳이다.
    사진출처 흥학관 ⓒ광주시청각자료실
  • 장재성·장매성 생가터 백서로 125번길 19-9 (금동 96,97번지) 일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장재성과 여동생 장매성의 생가 터이다. 장재성은 광주고보를 졸업, 일본유학 중 학교를 중퇴하고 돌아와 고등보통학교생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핵심인물로서, 관련자 중 가장 무거운 중형을 받기도 하였다. 장매성은 장재성의 동생으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당시 독서회 성격의 ‘소녀회’를 조직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사진출처 장재성·장매성
  • 구.광주적십자병원 천변우로 415 (불로동 174)
    1954년에는 적십자사가 운영하는 진료소가 양림동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와 광주적십자병원을 세웠다. 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낸 곳으로서 광주의 공동체 정신을 상징하는 곳이다. 1996년 서남대학교가 인수하여 ‘서남대학교병원’으로 바뀌었다가 폐교로 인해 2018년 문을 닫았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광주의 역사를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곳이라 하겠다.
    사진출처 광주적십자병원(1989) ⓒ광주시청각자료실
  • 정율성생가 터 서석로 10번길 5 (불로동 161번지) 일대
    중국에서 3대 작곡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정율성은 광주에서 출생, 숭일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봄, 중국 남경(南京)으로 건너가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뒤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음악공부를 하였다. 항일구국운동이 한창이던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에서 활동하는 등 음악공부를 하면서도 쉬지 않고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44년 4월 연안으로 돌아온 뒤 광복을 맞이했다. 1951년 4월 중국으로 건너가 1976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사진출처 정율성 불로동 옛집 ⓒ광주시청각자료실
  • 신문잡지종람소 터 서석로 10번길 3 (불로동 164, (구)광주적십자병원 뒤) 일대
    사립측량학교가 있었던 부동정 92번지에 1910년 6월 전남도립광주농림학교가 생겼다. 한옥건물로 작은 규모의 학교였고, 실습지는 광주천 넘어 양림동에 있었다. 1917 1917년 최한영을 비롯한 광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서석초등학교) 출신이 모여 이 곳에 '신문잡지종람소'를 열었다. 이 곳은 신문과 잡지를 함께 읽고, 공부와 강연, 소식을 주고받는 장이었다. 3.1 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운동을 조직한 공간이었다. 신문잡지종람소는 최명구가 기증한 흥학관과 함께 광주정신의 원형 공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진출처 사립측량학교 개교 당시 전경 ⓒ 박선홍, 『광주1백년』
  • 부동교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 무렵, 광주 큰 장터 모래사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후 3시 30분, 수백 명의 군중이 모이자, 김복현·김강·서정희 등은 시위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운동의 개시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치고 국기를 휘날리며 강가 모래밭에서 언덕으로 올라와 부동교 밑 작은 시장으로 출발였다. 이렇게 시작된 광주 3·1운동의 시위대는 서문통을 거쳐 본정통, 북문을 지나 우편국으로 행진하였고, 이로 인해 103명이 재판을 받았다.
    사진출처 작은장이 있었던 부동교 ⓒ광주시청각자료실
  • 호남동성당 천변우로 393-17 (호남동 67)
    호남동성당 자리는 호남은행의 설립자, 현준호의 집이 있었던 곳이다. 바로 옆 집인 호남동 95번지(부정동 18번지)는 현준호의 손녀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외증조부인 김신석의 집이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조비오(조철현) 신부가 헬리콥터가 발포하는 광경을 본 곳도 이 곳 호남동성당의 마당이다. 그는 1980년 5월 21일 평화 수습책을 논의하고 도청으로 나가려고 결의하기 위해 호남동 성당에 신부들이 모인 상황에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호남동성당
  • 광주극장 충장로 46번길 10 (충장로5가 62-2)
    광주극장은 1935년 10월 1일, 광주면이 광주부로 승격하는 것을 기념하여 건평 400평에 2층 규모로 지어졌다. 세계적인 권투선수 서정권 환영회가 광주권투구락부 주최로 열렸고, 조선일보 편집차장인 함상훈의 ‘조선인 의무교육 실시’에 대한 강연회가 열렸으며, 김성구의 판소리 독창회가 열리는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광주극장에서 열렸다. 1968년 누전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광주극장은 전소되었고, 극장을 재건축한 이후로 지금까지 862석 단관을 가진 전국 유일의 극장으로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사진출처 광주극장 ⓒ최성욱
  • 장재성빵집, 김기권문방구 터 금남로3가 금남로공원 일대
    1929년 비밀결사조직 ‘성진회’의 핵심인물이었던 장재성이 독서회 운영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비조합을 설립하기로 하고, 김기권 등이 출자하여 조합을 설립하였다. 이곳이 바로 김기권 문방구점(광성문구점)이다. 장재성은 문방구점의 2층에 빵집을 열고 독서회원의 모임 및 토론장소로 활용하였다. 그곳은 광주의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모여 독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연구하고 토론하며 시대를 돌파하고자 모인 비밀결사의 자리로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사진출처 장재성 빵집 ⓒ공훈전자사료관
  • 광주우체국 충장로2가 16 (충장로94)
    광주우체국의 시작은 1897년 12월 불로동 서문통, 적십자병원 뒤편에 설치된 광주우체사였다. 1906년 7월 광주우편국으로 승격되었고, 1949년 11월 광주우체국으로 개칭되었다. 1897년 12월부터 우체 업무를 시작했고, 1910년 12월 12일 전화교환 업무를 개시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63년에  세웠다. 충장로가 최고 번성기를 누린 1970년대와 80년대, 이곳은 젊은이들이 만남의 장소로서 일명 ‘우다방’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사진출처 광주극장 ⓒ최성욱
  • 춘목암 · 광주미국문화원 터 서석로 29-2 (황금동 80번지)
    이 곳에는 일제 때 광주시내에서 제일 가는 요릿집 '춘목암(春木庵)' 이 있었다. 441평의 부지에 연건평 221평 규모의 건물로, 당시 광주의 유일한 조선인건축가인 김순하가 설계하였다. 해방후 적산(敵産)으로 미군정이 관리하였고, 광주미국공보원을 거쳐 광주미국문화원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 이후 광주지역 반미운동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으며, 이곳을 점거하며 미국의 광주학살 책임을 따지는 등 빈번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현재는 주차장건물이 들어서있다.
    사진출처 옛 춘목암자리 ⓒ 박선홍, 『광주1백년』
  • 본원사 터 중앙로 160번길 16-7 (불로동 1-21)
    본원사는 일본의 승려 오쿠무라 엔싱이 전남 관찰사인 윤웅렬의 도움을 받아 세운 일본사찰이다. 본원사는 광주와 목포를 오가는 일본 관헌의 숙소이자 일경과 정탐꾼들의 아지트였다. 사찰이었지만 사찰이 아닌 일본인들이 광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다. 해방이 되자 광주사람들은 본원사를 가만두지 않았고, 폐사 후 건축가 김순하가 사장으로 있었던 삼육건설사가 자리를 잡았다. 그 뒤 동명호텔 등을 거쳐 현재는 영화관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출처 본원사 ⓒ『광주지방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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